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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인가 의사인가? [Korea]

경건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안중근은 양반집안에서 1879년에 태어나 18살 때 천주교에 입신하여 일생을 경건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초대 조선통감으로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할 무렵부터 한국국내에서 일어난 의병에 참여하고,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유입해 있던 러시아 연해주에 체류하던 중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을 사임하고 연해주를 방문중이라는 사실을 듣고 하얼빈역으로 거사를 치르기 위해 갔다.
러시아군에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정부쪽에 넘겨져 당지에서 재판을 받고, 1개월의 공판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음해 3월26일, 사건 후 5개월만에 처형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은 ‘죽인자는 죽음을 당한다’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으므로, 근거없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의병 중에는 난폭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감화시키고 석방한 적도 있었다. 또,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도리에 맞게 정정당당하게 주장하는 안중근의 태도는, 체포 후에 그를 만난 공판 관계자나 형무관들을 감화시켰다. 특히 젊은 간수, 육군상등병인 지바 주시치(千葉十七)는 그에게 깊이 탄복하고, 안중근이 지바에게 남긴 유묵(遺墨)을 일생동안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넬슨 만델라가 수감중에 간수를 감화시켜 동조자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남아프리카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긴 세월을 옥중에서 보낸 만델라 ANC의장도,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에 저항하여 게릴라 투쟁을 전개한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도, 일부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일본 지폐의 초상화가 된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조슈한 출신인 그는 막부를 타도하는 운동에 참여하며, 1862년에는 막부 말기의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을 주장한 나가이 우타 암살을 꾀하고,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있던 영국공사관 전복을 위한 공격에 참여했고, 야마오 요조와 함께 하나와 지로•가토 고지로를 암살하는 등, 천황을 받들어 모시기 위한 존왕양이의 지사로서 활동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테러리즘이라고 한다면, 동포를 몇 명씩이나 죽인 그야 말로 테러리스트라는 명칭이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수상 재임중에 일어난 한국의 왕비 민비 살해에 있어서, 주범이었던 주조선국 특명전권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국의 왕비를 정부 관계자가 살해한 그야말로 국가 테러 그 자체인데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이라는 명분으로 면소판결, 석방되었다. 또한,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하고 한국의 실질적인 식민지화를 추진한 이토 히로부미는, 당초에는 ‘한일합병’에 반대했으나 후에 생각을 바꾸어,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하며 1909년5월 스스로 사임하고, 다음 해 ‘한일합방’의 길을 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시민사관을 창조하자
이전에 영토문제를 논했을 때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구미 국가들로부터 ‘역사 수정주의’로 불리는 일당들이 되풀이 하고 있는 역사관련 문제들과 전면적으로 대결하여 그들을 타도하려면, 전쟁에 대한 총괄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백 수십년간에 걸친 일본의 역사총괄이 필요하다.
옛부터 언급되어왔듯이 메이지유신은 신흥 부르조아에 의해 거행된 시민혁명이 아니라, 개혁파였던 하급무사가 오랫동안 문자 그대로 ‘상징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던 천황을 권위의 상징으로서 받들기 시작하면서 절대주의 왕조를 표방하여 이룬 개혁으로, 이 정권은 부국강병이라는 명분 하에 국가 주도로 자본주의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다른 아시아국가들이 모두 구미열강의 식민지, 반식민지화 되어 가는 가운데, 일본만이 그것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의 하나로 일본에게 개국을 강요했던 미국이 남북전쟁(1861∼65)으로 꼼짝달짝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일본에게 있어서 생각지도 못 한 행운이었을까? 차라리 일본도 다른 아시아국가들과 함께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서 절처하게 박탈당한 후에,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민족해방운동을 거쳐서 독립을 쟁취했다면, 일본도 오늘날 더 나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이 나라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모 나라의 식민지로서 계속해서 존재했을까?)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 자본주의 국가로서 걷기 시작한 일본은,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같은 아시아국가를 지배하여 식민지화하여 제국주의화를 완수한다. 메이지시대에서 쇼와시대 전기는, 그야말로 일본은 전쟁시대였다.
그러므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래 1945년의 패전까지, 절대주의적 천황제를 이데올로기의 기반으로 하여, 철저히 반민주주의적,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적 정치지배를 계속해왔고, 그 과정에서 국가경영을 실질적으로 지배해 온 것은 강력한 관료제였다.
그런 과정에서 하급무사였던 급진세력은 보다 민주적인 정권을 목표로 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일어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운동도, 바로 한국의 식민지화와 시기를 같이 하여 날조된 대역사건(大逆事件)에 의해 탄압되었다. 그 후,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에서 힘을 얻은 국제공산주의 운동 속에서 1921년에 결성된 일본공산당도 보통선거법 대신에 성립된 치안유지법에 의해 탄압, 전시하에서 근절되었다. 이 점이, 같은 추축국 중에서도 나치스 반대운동의 뿌리 깊은 저항에 부딪힌 독일 및 빨치산투쟁으로 무솔리니를 타도하고 왕정에서 공화제로 이행시킨 이탈리아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억 총옥쇄(總玉碎)’체제하에 있었던 일본은, 미국이 투하한 2발의 원자폭탄에 의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연합국=미군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천황제는 유지되었고, 전쟁 전의 정치체제를 옹호해온 반민주주의적,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적인 세력도, 온건보수 여당에 내포되어 살아 남았다.
전쟁 후, 감옥에서 해방된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민주주의자들은 한 때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정권을 장악한 적은 결국 없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전쟁에 대한 총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직접 전쟁과 관련된 사람들이 공무에 복귀하는 일마저 암묵리에 승인되었으며, 표면상 ‘민주화’된 일본은, 그 지하에는 메이지유신 이래의 관료와 반민주적 보수 정치세력의 지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유일하게, 선거를 통해 실현된 민주적인 정부라고 부를 만한 것은 2009∼12년의 민주당 정권이었으나, 그것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처럼 열매없는 꽃으로 끝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계의 냉소를 받고 있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활보하면서 ‘종군위안부는 어느나라에나 있었다’’난징대학살은 없었다’’센카쿠, 다케시마, 북방 4개섬은 일본 고유의 영토다’’도쿄재판은 부당하다’’안중근은 테러리스트다’ 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 일본의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패거리들의 헛소리를, 메이지유신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안중근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동양평화와 한일우호’를 빌어 마지 않았다. 국경을 초월한 ‘시민사관’을 목표로 하는 우리 국제시민들은 100년전에 안중근이 남긴 유언이야말로 마음의 양식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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